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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로부터의 도피 엄친딸의 자해
김**  |  조회 385  |  2018-11-22

 

등록 : 2018-11-19 08:45 수정 : 2018-11-19 13:14  한겨례신문

“있지, 난 적어도 우리 가족이 사람은 맞다고 생각해. 정 그지(거지) 같으면 성인 돼서 연 끊고 살자고 매번 다짐했어.

근데 엄만 나한테 그냥 기숙사 같은 곳으로 가버리래.

아빤 본인 딸에게 준 방이지 짐승 새끼한테 준 방이 아니래.

오빤 저딴 새끼 그냥 시설 같은 데 버리래.

난 이쯤 되면 궁금해. ‘가족’으로 생각하는데 저런 말을 할 수 있는지.

그러고 나서 가출하면 협박해가며 자꾸 찾아.

난 도대체 어쩌란 거야. 아, 가출했을 때 찾는 이유도 본인들 얘기할까 봐 무서워서 찾는 거지? 당신들은 내가 죽기를 바라는구나.


하긴 내가 자해했을 때 칼 들고 찾아와서 그럴 거면 차라리 죽으라 했으니.

도대체 내가 얼마나 무너져야 그만할까.

내가 날 탓하며 죽으면 그만해줄 거야? 이 일기 발견되면 태워버리겠지.

아무나 날 외면하지 않았으면 내가 이렇게 미치진 않았겠지.

아동보호 전문기관 거기서 날 더 나락으로 밀어버린 거네.

새삼 존나 좆같다. 죽고 싶어.”

중학생 ‘Wret Y’(15·예명)의 일기장에 남은 지난해 ‘어느 죽고 싶은 날’의 기록이다. Wret Y는 한가위 연휴 마지막 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기숙사로 가”(엄마), “짐승새끼”(아빠), “시설 같은 데 버려”(오빠)…. 자해하는 Wret Y를 향한 가족의 반응을 보면, Wret Y는 ‘날 때부터 문제아’였던 것 같다.

문제아, 자해하는 청소년에 대한 전형적인 편견이고 가장 흔한 오해다. 정반대로 Wret Y는 어릴때부터 뭐든지 잘하는 아이, 말하자면 ‘엄친딸’(뭐든지 잘한다는엄마 친구 딸)이었다. Wret Y는 지난 10월2일 <한겨레21> 인터뷰에서 화려했던 초등학생 시절을 떠올렸다.

부모의 기대는 끝이 없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학원에서 나가래서 준비도 안 하고 수학 경시대회에 나갔는데 전국권(전국에서 상위권)에 들었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는 학원에서 나가래서 수학 올림피아드 나갔고 거기서도 성적이 좋았죠. 스키도 처음 탈 때부터 중급에서 탈 수 있었고, 수영도 배드민턴도 탁구도 배우자마자 잘했어요. 운동하면 운동 잘하고, 악기 배우면 악기 잘 다루고, 지티큐(GTQ·그래픽기술자격시험) 2급을 초등학교 6학년 때 땄어요. 근데 엄마 아빠가 너무 기대하니까… 아무것도 안 하게 되더라고요. 인간의 능력에 한계치가 있는데 그걸 뛰어넘기 바라시니까… 좋아하는 게 있어도 포기하게 되는 그런 거.”

국내 대기업에 다니는 맞벌이 부부인 Wret Y의 부모는 교육열이 높았다. 어릴 때부터 학원이라는 학원은 다 보냈다. “저랑 오빠가 좋아서 한 게 아닌데, 밖에 나가선 우리한테 못 해준 게 없다는 듯이 자랑을….” 지금도 부모님이 “해달라는 거 다 해줬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주장하는 근거다. 수학학원에 다니기 시작한 건 7살 때부터다. Wret Y는 부모의 기대에 부응해 초등학교 6학년 때 고교 수학인 ‘수Ⅱ’를 배울 정도로 진도가 빨랐다. 영재고에 가려는 아이들이 밟는 선행학습 코스다.

겉으론 모두가 부러워하는 엄친딸이었지만 Wret Y는 터져버릴 듯한 답답함을 자주 느꼈다. “똥 싸다 중간에 끊긴 느낌… 더 싸고 싶은데 나오지 않는 느낌이에요. 아, 얼마나 짜증이 나느냐면요, 2~3일 동안 생리혈이 없어서 생리 끝난 줄 알고 생리대 안 하고 흰 바지 입고 나왔는데 갑자기 생리가 다시 터진 그런 기분이에요. 딱 그런 느낌이에요! 그럴 때 자해를 하면 ‘이너 피스’(내면의 평화)….”

부모님이 “우리 애는 천재가 아닌가 몰라” 자랑하고 다니던 그 무렵이다. Wret Y는 “되게 어릴 때부터 힘든 일이 있으면 습관적으로” 자해를 했다고 했다. 손톱을 뜯거나 머리를 쥐어뜯거나 책모퉁이로 피부를 ‘슬라이스’(베는) 하는 행동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시작한 것으로 기억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커터칼을 손에 쥐고 ‘리스트컷’(손목긋기)을 시작했다. “자해는 하면 할수록 효과가 없어지고 ‘현타’(현실자각 타임)가 오면 내가 했던 행동(자해)이 민망하고 후회되는데 그냥 습관적으로….” 리스트 컷은 올해 초까지 이어졌다.

황준원 강원대 의대 교수(정신건강의학과)는 설명했다. “흔히 문제아들만 자해할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지만, 공부 잘하고 전교 회장인데도 자해를 한다. ‘도대체 네가 왜 자해를 하니?’ 어른들이 보기엔 이해가 안 가는 아이들인데, 그 아이들은 잘하면 잘할수록 목표가 올라가기 때문에 공부를 잘한다고 스스로 만족할 수있는 게 아니다. 공부 잘하는데 자존감이 낮고 자해하는 아이를 흔히 보게 된다. 공부를 잘하면 모든걸 잘하리라는 선입견이 있지만,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감정을 조절하는 데는 취약할 수 있다. 공부는 잘하지만 자신이 완벽하지 않아서 생기는 불안감을 조절하기 어려워하기 때문이다.” 부모는 4년여 동안 Wret Y의 자해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시험 성적은 감출 수 없지만 자해 흔적을 감추는 것은 너무도 쉬웠다. 자해했다고 말하지 않고, 여름에도 긴팔 옷을 입고 다니면 그만이었다. 자녀의 성적에는 예민하지만 자녀 몸의 상처에는 이상하리만치 둔감한 부모…. 이 역시 자해하는 아이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부모들의 무신경이다. Wret Y는 “살짝 불안해서 손톱 물어뜯는 거랑 달리, 자해로 손톱을 물어뜯은 건 딱 봐도 손톱이 너무 짧다. 또 문 잠긴 아이 방에서 자꾸 둔탁한 소리, 딸각거리는 소리가 나면 백퍼(센트) 자해”라고 귀띔했다.

‘네가 도대체 왜?’ 부모의 공격

사실 자녀는 자해를 시작하기 전 부모에게 에스오에스(SOS)를 쳤을 가능성이 높다. 홍현주 한림대 ‘자살과 학생 정신건강연구소’ 소장은 “자해를 하기 전에 아이가 분명 힘들다고 말했을 텐데, 부모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부모 세대가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이들과 다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황준원 교수는“어른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부분만 본다”며 의사소통 문제를 지적하기도 했다.

부모가 Wret Y의 자해를 알게 된 것도 ‘인지’가 아니라 ‘고지’에 의한 것이었다. “중1 때 위클래스(학교 상담실) 쌤(선생님)이 어디서 제보를 받으셨는지 저를 부르시더라고요. ‘네 팔이 어떤 상태인지 보여줄 수 있냐’고 물으셔서, 제가 ‘싫다’며 불안한 눈빛으로 쳐다봤더니 바로 힘으로 제 스웨터를 까시고…. 그다음부터는 그지(거지) 같아졌죠. 쌤이 아무 생각 없이 제 의견은 묻지도 않으시고 그냥 엄마 아빠한테 전화하셨어요.”

그날 이후 Wret Y는 집에서 ‘엄친딸’ 대신 일기장에 적힌 대로‘짐승 새끼’가 되었다. 선생님의 전화를 받고 학교로 달려온 아빠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 Wret Y가 학교 앞 분식집에서 파는 떡볶이를 먹고 싶다고 하자 아빠는 “너는 그렇게 사고를 쳐놓고 그게 먹고 싶냐”고 혀를 찼다. 엄마는 Wret Y가 집에 들어가자 탄식과 함께 고개를 휙 돌리며 외면했다. 그 뒤론 Wret Y와 부모 사이에 갈등이 생길 때마다 “그러게 너는 왜 손목을 그어서”가 엄마 아빠의 레퍼토리가 됐다. Wret Y는 “부모님이 이유 같은 거 필요 없고 그냥 나를 한심하게 봤다. 커터칼을 빼앗고 정신병자 취급하면서 ‘네가 그런 식으로 행동하니까 그따구(따위)밖에 안 되는 거 아니야’라고 말했다”는 슬픈 얘기를 하면서도 익숙한 체념인 듯 그냥 웃었다. Wret Y가 부모에게 들은 가장 가슴 아픈 말은 “너는 그 정도 인간밖에 안 된다”였다. 부모의 모진 말에 상처받은 Wret Y는 “‘절대 그 사람들(부모님)의 말에 순응하지 않을 거야, 그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며 “반항심이 생겨서 (자해를) 더 하게 됐다”고 말했다.

자해를 들킨 뒤부터는 드러내놓고, 일부러 부모의 기대를 꺾었다. 지난해에는 지능지수(아이큐) 테스트 때 작정하고 테스트를 망쳐버렸다. 들킬까봐 너무 쉬운 것만 아는 대로 말하고 어려워 보이는 건 일부러 정답과 다르게 말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지능지수는 ‘99’였다. Wret Y는 “아빠가 ‘얘가 책 읽을 때도 한번 훑어보면 내용을 다 기억하고, 날짜도 잘 기억하는데 어떻게 아이큐가 99냐, 머리가 안 좋은 게 아니라 의욕이 없는 애’라며 현실을 부정했다”며 웃었다. 지난 6월부터 9월 초까지는 아예 학교에 가지 않았다. 유급처리가 될까봐 다시 학교로 돌아가긴 했지만, 수업은 받지 않고 등교하자마자 조퇴를 했다. 선생님한테 불만이 있어서는 아니다. 올해 담임선생님은 좋은 분이라 Wret Y가 상처를 받을까 말 한마디도 조심해주지만 “학교라는 공간 자체가 싫다”고 했다. “선생님이 Wret Y 사정 아니까 지각해도 돼” 공식적으로 ‘편애’를 하지만 그게 더 부담스럽다. “다른 애들이 ‘쟤는 이상한 애라서 우리가 봐줘야 한다’고…. 그래서

저는 올해도 저희 반에 친구가 한 명도 없습니다.” Wret Y는 성격이 활달하고 자해 사실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친구도 많았다. 지금은 학교에서 ‘은따’(은근히 따돌림받는 아이)고, 학교 밖 친구들사이에선 ‘인싸’(인사이더)다. (기사 마감이 있던 11월14일 늦은 오후 Wret Y는 “결국 유급됐고, 대안 교육기관에 다니며 내년 4월 중학교 검정고시를, 8월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볼 것”이라고 연락해왔다.)

차라리 부모를 떠나라는 조언

중3인 Wret Y는 부모의 기대와 달리 지금 만능 엔터테이너가될 준비를 하고 있다. 최근에는 아빠를 졸라 1년에 300만원이 드는 아역배우 소속사 겸 학원에 등록했다. 공부는 중1 때 공식적으로, 완전히 손을 놨다. 인터뷰 이틀 전 수학 문제집을 풀었더니 다 맞았지만, “혹시 또 기대할까봐” 부모님 앞에서 문제집 같은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고 했다. “뭐라도 공부하는 모습을 보이면 기대를 하기 때문에 집에선 일부러 아무것도 안 하고 침대에만 누워 있다”는 설명이다. Wret Y는 최근 심리 상담을 시작했다. 상담사는 “(Wret Y가) 가진 능력이 남들보다 많더라도 의욕을 잃어버리면 스스로를 잃어버릴 수 있다”며 “부모를 떠나 기숙사 고등학교 진학이나 유학을 권했다”고 Wret Y는 말했다.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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